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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0) <BR>극단 '민족' 발기 취지문(1971년)이 땅에 신파 내지 신극이란 이름으로 서구 근대극의 물결이 발을 들여는 것이 일제의 상륙과 같이 힘 부끄러움의 첫 발자욱이었다. 그동안 숱한 민족적 수난들을 겪어오면서 연극 예술은 그때 그때의 정세와 숨박꼭질하며 어렵게 명매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명맥속에 담아야 할 의지들이 정직하지 못하였고 그 지표마저 불투명하였음 전통극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몰이해, 그리고 전문화될 수 없는 연극취향의 무분별한 상황속에서 방황 음을 보아왔다. 그 하나는 소위 신파라하여 대중의 비위를 긁어주거나 마무려버렸던 흥행적 연극과 다른 하나는 연어 인의 입맛과 말초감각에 기생하여 안일한 작업으로 경주하여온 귀족적 연극들이 바로 그렇다. 그런점에서 극단 '민족」은 다시금 이와 같은 경위와 과정을 반복할 수는 없을뿐 아니라 응당 있어야 제시의 어려운 역을 자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증이 바라고 요구하는 절실한 생활과 그 구체적당 에 접근하여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항상 역사의 눈금이어야겠다는 점에서 우리의 작업은 활의 무대이며 사회비판의 광장으로서의 매개체가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이제 연극은 종합예술의 안일성에서 탈피하여 행동예술, 참여예술, 메디아예술의 본질적인 전진으로 같은 방향과 입장을 밝히면서 극단 민족」은 출발을 기하고저 한다. 첫째, 본 극단은 보다 큰 차원에서 민족극 수립을 목표로 하는 바 바야흐로 닥친 시대적 자각과 사명 위하여 전통문화의 유산인 우리 전통극을 젊은 세대에 이어주고 점진적으로 민속극의 무대화에 총력한 둘째, 민속극 전수로 수련된 연기와 함께 우리 민속극에 내포된 모든 탁월한 연극예술적 부분(때이 즘 : 연출, 연기, 창법, 무대, 화술, 의상, 가면, 조명 등)을 재현 모든 창작극과 번역극에 접목하며 세째, 되도록 창작극(번역극도 포함)은 사회 문제극(쏘시알 풀레이)과 음악무용극(뮤지칼 드리 격을 띠는 것으로서 서사적인 극형식을 취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과 같이 호흡, 비판하고 넷째, 모든 번역극도 되도록 번안극으로 편하여 우리의 몸짓과 율동과 생활감정에 맞도록 할 것이며 다섯째, 이상과 같은 방향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본 극단은 민족극연구회라는 연구체를 두어 이 방 둔 연구가나 관심있는 사람들을 초빙, 수시로 쎄미나를 열어 충분한 연구를 거듭하고 사전에 제작을 토리도 심의 검토하며 또한 사회 각계 각층과의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서 극단 주체의 기획진과 제작진 자료를 제시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한다. 이제 닥칠 통일의 문턱에서 우리는 연극이라는 참된 메디아를 통하여 우리의 염원, 의지 그리고 방 우는 민족예술의 시련대가 되 1971년 2월 김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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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9) <BR>김세중의 한국민속가면무극 춤사위 발표회1969년)멍석 위에서 민속극에 뜻을 둔 이래 가장 절실했던 것은 둔한 몸을 가지고 직접 춤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생활의 분신의 하나인 전통 민속극과 좀처럼 사귀어지지 않았던 불행스런 이유가 내편에 있음은 내자신이 그 앞에 자칫 생소한 손님으로 때로는 우리극 자체가 엉뚱하고 별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했던 흥분한 나의 눈에 기인되었기 때문이다. 춤이 꼭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사회적 여건 시대상을 비롯한 절실한 생활의식들을 담고있는 우리 무소(舞 素) 속에는 우리의 모든 역사의 분자들이 집약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대다수 서민들의 생활감정을 밑바탕으로 가장 빨리 흡수하고 가장 빨리 내어 뱉으면서도 자기것을 익혀 만들 어간 몸짓이 바로 디딤과 벌림의 '덧뵈기춤'이라고 본다. 몸 마디마디의 멋(神)을 감고 또는 모으고 또는 꺾고 매쳐서 베긴것을 풀어 내거나 뿌리면서 중심을 잃은 듯한 춤짓들이 여유있게 디뎌가며 벌려나가는 것이 그 특징이 아닌가. 몇 평 안되는 마당에서 좁은 논두렁길 언덕바지에서. 꼬불꼬불 산길 따라 논뚝따라 애환과 갈등들을 질라서 보릿대춤으로 달래며 짓이겨가면서 숨차게 염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그 속에 엉켜있는 것이다. 춤을 익혀주신 네 분의 연로한 스승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분들의 숙련된 춤사위와 서투른 자신의 모습을 보 여드리며 지극히 지루하나마 조잡히 깨여져가는 어설픈 현대화에 탈춤의 정직한 자료로서 내놓은 것이다.(김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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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6) <BR> 狂氣와 執念의 사나이윤대성/희곡작가 무세중의 본명은 김세중이다. 그는 성균관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2년 드라마센타가 개관되어 거기에 연극 교육기관인 연극아카데미가 생겼을 때 1기생으로 들어온 연극 지망생이다. 필자도 같은 과정에서 김세중과 함께 공부했다. 그때 아카데미 원장은 여석기 교수있고 우리를 가르친분 들은 柳溪 吳華變 金正鈺 梁東君 李杜鉉 등이었다. 약 20여 명의 인구생들은 매일밤 드라마 센타에 모여 강의를 듣고 명동에 내려가 술을 마시며 연극에 관해 토론했다. 이때 김세중과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별로 딴일할 것도 없는지라 매일 낮부터 하루종일 드라마센타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보고 연습장면도 참관하면서 연극의 체질을 익혔다. 틈틈히 남산에 올라가 소주도 마셔 가면서. 그러다 얘기가 미진하면 그의 돈암동 집까지 가서 마시고 떠들며 소일했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연극에 대한 것이었고 나의 작품 구상에 대한 비판이였다. 그는 나보다 늘 앞서가면서 어린 내 생각을 깨우쳐주고 자극을 주었다. 내 초기 작품의 상당수가 그의 조언을 받아 완성된 것들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통민속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드라마센타에서 처음 초빙한 김노인으로부터 봉산탈춤을 배우고 있었다. 아마 그가 운동에 관심을 갖게되고 결국 몸짓을 통해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자신의 연극표현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드라마센타의 극작 WORKSHOP에도 참여하여 작품도 썼다. 그러나 그의 분방한 사고와 열기를 담기에는 원고지란 매체는 그의 사고를 제한하는 속박으로 작용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제작하고 연출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출연하여 그의 몸 속에서 끓어 오르는 열기를 발산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연극인들은 김세중하면 좀 돌지 않았나 할 정도로 그의 광기는 점차 도를 더해 갔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그 압제의 사슬을 조일때라 김세중의 광기를 용납할리가 없었 다. 그의 작품공연 기도는 번번히 제지당했다. 그는 강열한 메세지가 담긴 공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민속춤, 탈놀이등의 전통연희로 돌아왔다. 이 때 김세중은 그의 성을 무로 바꾸었다. 그리고 민속주점을 경영했다. 그가 가장 어려웠을 시절이면서 또한 각오를 새롭게 한 시절이기도 하다. 성까지 바꿀 정도로 이 나라는 그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독선적인 제도하에 있었고 또한 연극계는 편협했다. 어느날 그는 훌훌 털어버리듯이 나라를 떠났다. 베를린은 그에게 신천지였다. 각국에서 모여든 광적인 정열을 지닌 연극인들과 무세중은 길 어울리는 앙상블을 이루었다. 역시 무세중은 리더였다. 그의 탄탄한 전통예술에 대한 이론과 춤 실력(?)으로 단연 그의 작품은 베를린의 실험극단들 중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마음몇 벗고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곳, 그곳이 베를린이였다. 몇년 후 그는 귀국해서 "통·막· 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이란 작품을 발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후 그는 계속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작품을 발표해 언어를 배제하고 몸짓과 소리만으로 강한 메세지를 진부해지고 획일화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는 부단히 실험하는 자세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 목소리를 갈구하는 관객이 늘고 있다. 무세중에게도 또 한번의 변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새 작품 "上下左右,東西南北을 기대한다. 거기서도 틀림없이 그의 광기가 그 집념을 빛을 낼 것이다. 198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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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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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3)<br>무세중 명인의 무사위 춤사위무(巫)사위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 지역 탈춤을 전수 받고, 탈춤의 기본 동작에 철학적 의미의 '태극'(太極)을 조합시켜 재창작한 춤사위이다. 대학 신입생 20세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탈춤의 근원을 찾아 또 다시 전국을 누볐다.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이때 발표한 춤사위가 이후 무사위의 근간이 된다. 이후 연극영화과 강의 후 새내기 학생들에게 무사위를 가르쳤다. 민속악회 ‘시나위’ 창립, 민속극회 ‘남사당’ 결성, ‘동아민속예술원’ 창립, ‘극단 민족’ 창립 등 ‘민예부흥운동’의 최 전위에 섰다. 1971년 동아민속 예술원을 설립하고 극단 민족을 창립하여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의 민예 부흥 운동으로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서 왔다.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男舍堂祭)를 기획 연출,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여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무세중은 태생적으로 굿에 열정을 품은 굿쟁이로 태어나 전위 전사의 무당 칼과 창을 들고 민족 분단의 벽을 치고 민족 분열을 용서치 아니하며 민족의 앞을 지키고자 전위(前衛) 행동의 공연을 끊임없이 저질러 왔다.(중략) 또한 무사위(musawee)라는 무세중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춤과 연기 양식의 한극을 만들었으며 그의 춤은 혼을 부르는 춤사위로 영적(靈的) 움직임이 그 좌표가 되며 태극 원리처럼 철학적 상징의 즉흥무로 이어지고 있다."(『무세중의 전위 예술 충돌 50년』서평) 무세중(전위예술가)1937년 서울생. 본명 김세중전위 예술가, 시인, 대동전위극회 대표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명예 이사장 학력서울고등학교,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연극학과 졸업드라마 센터 연극 아카데미 (서울예술대학) 졸업베를린 자유대학 (Freie Universität Berlin) 민족학과 수학경력 1971년 극단 <민족>창단 동아민속예술원 원장 1972년 『한국민속극춤사위연구』(김세중, 동아민속예술원) 1973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 1975 마당극제 노비 문서 전시회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 1977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 1969-1976년 사단법인 민속극회<남사당> 대표1977년 독일 Berlin극단 대표 1982-2020년 통일아리랑 (통상100여 회 발표)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발표 1983년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대진대학교/대학원 연극과 출강(1983-2005)(1987-현재)대동전위극회 대표 2011년 제6회아리랑 상 수상 연출가, 안무가, 통일문화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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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콱 뒈져라. 먹고 싶어 죽겠다. 에라 죽으면 편하지. 너하고는 죽은 인연이야. 너 죽어볼래. 죽어도 못다하는 사랑아.서양 사람들은 위의 모든 죽음의 말들에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인 죽음의 형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죽음의 의미를 갖는 행동 관념을 다 운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죽음 그 자체로서 생(生)의 반대되는 현상으로 삶으로부터 이잘화시켜 놓는다. 즉 죽음은 삶의 적이며, 공포이며, 부정이며,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문지방 하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늘 함께하는 친구이며 언제나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이며 매일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죽음이며 생노병사(生老病死) 중의 하나로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자연순회의 그것처럼 밥 먹듯이 죽음과도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생사(生死)의 관념은 생(生)과 사(死)의 유기적 관계 속에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통ㆍ피ㆍ살은 '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의 줄인 말이다. 귀국 후 첫 작품으로 '통ㆍ막ㆍ살'을 했던 것이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통일에 대한 한 민족인으로서의 몸부림이었다면, 피의 살풀이는 민족 본능에 충동하여 통일을 막으려는 외세와 공포의 핵 공해에 대처하려는 투쟁의 일환으로 죽어있는 통일에 민주의 '곡(哭)'을 바치는 행위이다." (본문 118~119쪽, '통ㆍ피ㆍ살(TongㆍPiㆍSal) 때 : 1987년 8월 3일, 곳 : 바탕골 소극장' 중에서)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7년까지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평생 예술작업이 담겨있다.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이며 이처럼 한 전위예술가의 50년동안의 전위예술행위가 한 권의 책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오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무세중의 전위예술은 저자의 20대 시절부터 시대에 대한 회의와 대안을 향한 끊임없는 사고의 결과들이다. 따라서 ‘충돌50년’이라는 의미는 저자가 한평생을 바쳐 현실과 역사와 끊임없이 대면하고 저항하고 대안을 찾아 부단히 행위를 해 온 고독하고 힘겨운 예술작업의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한국전위예술을 실제적인 공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의 예술적 자세, 공연의 목적과 행위의 이론적 근거들이 일일이 제시되고 있어 전위예술에 대한 실제와 이론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공연을 한 연도와 날짜 출연자와 더불어 사진들을 함께 수록해 명실공히 한국 전위예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노예술가의 평생예술업적을 기록하고 있다.특히 전위예술은 서구적 예술행위로 인식되어 왔으나 무세중은 이 책에서 전위예술의 전위성이야말로 우리민족 특유의 민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무세중은 이 근거로 우리의 탈춤이나 고대 및 중근대사에서 민중들의 행동방식이나 놀이 등 그리고 민중들이 역사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전위예술술의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무세중은 독일 체류 기간 동안인 1977년부터 1989년 동안의 전위예술 행위를 통해 한국 전위예술의 실험을 무수히 시도하고 유럽에 한국의 탈춤이 갖는 전위성과 한국전통예술과 서구적 행위예술의 접목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자의 전위예술의 기본 맥은 전통과 현대이다. 즉 한국의 전통적 미학이 어떻게 하면 세계적 미학과 결합하여 보편적 미학의 세계로 다가가느냐가 저자가 탐색하고 있는 전위예술의 본질이다.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민족성이다. 즉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이 갖는 특징적 요소들이 무세중 전위예술의 근거들이 되며, 저자는 민족성을 민중들의 삶에서 찾고 있다. 민중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낙관적 자세와 역경이 닥칠수록 뭉치는 끈질긴 생명력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의 고대 중근대의 민중들의 삶의 방식과 형태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민중의 생활 속 예술행위들에서 찾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만 난무하는 한국의 전위예술에 이론적 근거와 한국적 전위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역사적인 전위예술서라고 할 수 있다. 무세중 (지은이) 무세중(巫世衆)의 본명은 김세중(金世中)이다. 상식 밖으로 ‘무(巫)’라는 성으로 바꾼 이유는 김(金)씨 문중의 자손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손(天孫)’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고, 민족의 근원과 얼이 깃들어 있는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젊은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 8천 리를 걸어서 순례하며 연구하고, 깨달음을 작품 속에 진일보하여 승화시키려 했던 전위 예술가이자 굿 예술가이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연극학 석사를 마치고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활동해 왔으며 50년간 500여 편의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주로 통일과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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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학 학술회의 "종묘제례악의 전승" 2003년 12월 18일(목)~19일■ 일시 : 2003년 12월 18일(목)~19일(금) ■ 장소 : 국립국악워 국악연수관 207호 ■ 주최 : 국립국악원․문화재청 ■ 주관 :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 □ 12월 18일(목) 09:30 : 등록 10:00 : 개회(김경희 학예연구관) 10:20 : 인사말(김철호 국립국악원장) 사회 : 송방송(한국예술종합학교) ㅇ 제1주제(10:20-11:20) : 대악후보와 속악원보의 종묘제례악 비교연구 발표 : 이동복(경북대) 논평 : 신대철(강릉대), 조운조(이화여대) ㅇ 제2주제(11:20-12:20) : 속악원보 인편과 신편의 종묘제례악 비교 연구 발표 : 최헌(부산대) 논평 : 김영운(정문연), 송지원(서울대) ㅇ 중식 : 12:20-14:00 ㅇ 제3주제(14:00-15:00) : 속악원보 수록 악곡 연구 발표 : 남상숙(원광대) 논평 : 김우진(전남대), 윤명원(단국대) ㅇ 제1일 종합토론(15:00-) □ 12월 19일(금) -사회 : 권오성(한양대학교) -주제발표 및 논평 ㅇ 제4주제(10:00-11:00) : 조선후기 장악원 연주자의 전승 계보 발표 : 서인화(국악원) 논평 : 김세중(서울대), 손태도(서울대) ㅇ 제5주제(11:00-12:00) : 종묘제례악 악장 연구 발표 : 이숙희(국악원) 논평 : 임병옥(국악원), 이진원(한국예술종합학교) ㅇ 제6주제(13:30-14:30) : 기록의 측면에서 본 시용무보의 특징 발표 : 김현주(대전대) 논평 : 유시현(한예종), 김용(숙명여대) ㅇ 제2일 종합토론(14:30-) * 최경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01-29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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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무)세중 제5대 신임 이사장1980년대 <통일아리랑>이란 행위극으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전위예술의 개척자 김(무)세중선생이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제5대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한완상(전교육부총리)이사장에 이어 새 이사장을 맡게 된 선생은 기존의 역대 이사장들과는 다르게 행동으로 아리랑정신을 실천해 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리랑연합회는 1983년 아리랑정신(저항정신·연대와대동정신·해원상생정신)을 통해 민족공동체 실현을 목적으로 결성, 20주년을 맞은 문화단체이다. 그동안 진도·밀양·정선의 아리랑 주제 지역축제를 도시형 축제와의 결합으로 민족축제로의 가능성을 타진해 왔고, ‘아리랑 칸타타’와 같은 타 장르의 작품을 창작, 발표했고, 음반<북한아리랑> 발매 같은 구전 아리랑의 음반화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진도와 정선에 박물관 건립을 위한 실무작업에 들어갔고, 해외 20여개국에서 아리랑자료를 구입, 세계화 실상을 데이터 베이스화하고 있기도 하는 등 성년을 맞은 단체이다. 김세중 이사장은 현재 <大同 前衛劇會>를 이끌고 몇몇 대학에서 실질적인 실연 강의와 초청강연에 임하고 거의 매일 무용·연극·국악 공연장을 참관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달에는 <국악예고>의 초청강연에서 ‘무사위’를 실연하고, "기회를 준다면 여러분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여 박수를 받았다, 한편 내달까지 새로운 이사진 구성과 주요사업을 확정, 6월에 취임하게 되는데, 주요사업에는 아리랑학교 개설과 교과서 편찬, 소식지 창간, <아리랑의 날> 제정 공포, 아리랑경창대회 개최 등이 주요사업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 12월 대 수술을 하였음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특히 처음으로 제도권 단체의 수장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아리랑이 민족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 하는데 큰 역할을 해 줄 것을 관련 단체와 아리랑 메니아들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무세중(金世中)의 예술 세계는 깨고, 깨달음, 깨우침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 나가야 할 길을 예시하고 밝혀주는 역할로서 연극적 형식을 빌어 승화 시키려는 무사위 도극(道劇)을 창안 창조 하여왔다. 민족 연극의 모체인 굿을 현대적 안목으로 이끌어 내어 미래를 조망하고 통일과 민주 사회에 대한 열망을 작품에 담아 퍼포먼스와 전위굿으로 표출해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고도를 기다리며 67), (호질) 연출 이후 현재까지 (무세중 창작 발표회’ 5),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禮봐라), (통일 아리랑), (검은 넋), (못생긴 美女), (유리굿), (정보살인), (無作爲的 作爲), (절망하는 바다), (應作如是觀), (죽음 만세), (맥베드), (왕산 開天), (흰피붉은강), (유리戰爭), (쐬굿), (대표 (’77-현재) 등을 역임했다. 현재 대진대학교 연극 영화과 출강하고 있으며 大同前衛劇會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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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문화 발전의 기반구축을 위한 토론회-국가적 정체성과 세계적 보편성의 문제- (사)진단전통예술보존협회는 지난 12월 11일 타워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국악문화 발전의 기반구축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는 홍윤식(한국전통예술학회 회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노동은(중앙대 국악대학) 교수의 「21세기 한국음악의 발전 방향」과 최태현(중앙대 국악대학) 교수의 「국악용어의 역사적 함의(含意)」라는 두 가지 발제와 이상일(성균관대) 교수, 김용진(한양대 국악과) 교수), 이장직(중앙일보) 기자, 윤여준 국회의원, 부두완 서울시 의원, 최종민(동국대 국악과) 교수, 유영대(고려대) 교수, 윤명원(단국대 국악과) 교수, 최상화(중앙대 국악대학) 교수, 김세중(서울대 국악과) 강사 등이 참여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의 토론에서 노동은 교수와 최태현 교수는 발제에 대한 부담감과 어려움에 대해 실토하고 본인의 결론이기 보다는 제시하거나 있는 사실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했다. 사회를 맡은 홍윤식(한국전통예술학회) 회장은 발제 후 논평자들에게 발제의 논평을 떠나 ‘한국음악을 해야 하는 당위성과 국악발전을 위한 토론장’이 되었으면 한다고 지정토론자들에게 강력하게 제의했다. 이상일 교수 : “국악계에 대해 ‘어휘의 보편성의 문제와 자기 미화’에 문제점이 있다. 또한 국악은 사회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해서 무용?미술?연극 등 총체적인 문화예술로 발전시킨 통합예술이 탄생되어야만 대중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김용진 교수 : “먼저 국악인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아악과 민속악의 대립구도를 벗어나고, 준비된 국악인을 양성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장직 중앙일보 기자 : “대부분의 공연극장이 서양식 극장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국악만을 위한 소극장이 필요하다 특히 사대문 안에 국악상설극장이 필요하며, 그것이 ‘명동국립극장’을 국악전용극장으로 활동하는 좋을 것 같다. 또는 청계천 개발을 이용해 국악전용극장을 확보할 수 있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윤여준 국회의원 : “국악과 국가 경쟁력의 관계” 피력하였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다. 따라서 문화가 21세기의 국가 경쟁력 이다. 국가는 차별성 있는 문화를 찾아서 문화적 이미지를 투영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문화가 삶의 기준이 되는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산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 목표를 추구하여 자발적으로 사회에 참여시켜야 한다. 그것은 공연문화이어야 하며 바로 그것이 국악이다 공연문화에서 국악의 역할과 역량은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로 국악은 서양음악에 대한 대항적인 자세를 탈피해야 한다. 현재 국악관현악단은 옷이 몸에 안 맞는다. 국악관현악단은 지휘 모션과 서양식 오케스트라와 같고, 서양음악의 대위법과 화성에 의해 국악 작곡이 이것이다. 내가 어려서 만난 신쾌동 선생은 가야금은 양성이기 때문에 음성인 여자가 하면 좋은 악기이고, 거문고는 음성이기 때문에 양성인 남자가 하는 좋다고 하였다. 농현은 생명적 근원이다. 철학과 생명력이 있는 국악은 서양음악과 다르다. 따라서 국악이 보편성을 추구하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음악은 유교적, 불교적 정신이 잠재되어 있는 음악으로 자아를 넘어선 도도한 음악이다.” 부두환 서울시 의원 : “국악계는 기획력이 부재하다. 스타 키우기에 부재하며 일반인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감상적 접근방법이 없다. 따라서 국악계에서는 ‘국악소재 드라마 개발’, 국악놀이 및 이벤트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 기획사가 필요하다. 또한 지방자치” 김세중 씨 :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초적 경제력을 갖추어야 하고 보다 정부서 보다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윤명원 교수 : “음악교육은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국악교육론이 필요하다.” 최종민 교수 : “국악이란 용어는 구한말 궁중 음악대가 생기면서 국악사장, 국악사, 국악수장, 국악수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일제 시대의 잔재는 아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또한 음악에 있어서는 한국이 세계적 강국이이다.” 최상화 교수 : 한국의 장단을 이해한다면 세계의 어떠한 장단도 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밖에 국악포럼에서는 국악의 발전방향에 대해 이상일 교수는 “현재 문화예술계는 기층문화로 변해 있다. 그러나 국악계만이 유일하게 기층문화가 중심에 있지않다.”고 지적하면서 “국악계가 사회학적인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일설 했다. 그리고 “주제를 좁혀서 구체적인 현황과 김도 깊은 세미나와 토론회를 통해서 해결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충건 서울지방 법원장은 “국악이 디지털문화와 접목 시키는 방향과 정보 통신부과 접목도 앞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승국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감은 현재 남원에 있는 국립민속국악원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했다. “국립민속원은 민속음악을 추구하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관리 시스템은 서울의 국립국악원에서처럼 국악 양성소 출신이다. 그러나 국악 양성소 출신들은 기층문화의 세력이 될 수 없다.”는 점과 “해방 이후 요소별 접근에 막대한 예산이 국립국악원 지원된 상활 속에서 대등한 예술문화를 기대 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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